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영향 (문단 편집) === 정치적 영향 === 정치적으로는 휴전 이후 김일성과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 탄압하는 대의명분을 얻으면서 양측의 권력이 공고화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파, [[남조선로동당|남로당]]파, 연안파 등 [[조선로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을 거의 숙청하여 북한 지도부를 종전의 연립정권 형태에서 김일성의 직계인 만주파가 정권을 독식하는 구조로 바꿔버린다. 한국에서는 휴전 이후 [[반공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남한에서는 휴전 이전부터 [[발췌 개헌]]이 전쟁시의 혼란상을 이용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북한은 현재까지도 독재가 진행 중이고 남한에서도 1987년 [[6.29 선언]] 이전까지 독재가 이루어졌다. 한반도의 국민적 차원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 그대로 전쟁을 겪었던 장년층들은 물론 그 이후에 중년층, 그리고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6.25 직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징병제]]가 실시되는 주요한 계기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한국군의 규모를 약 10만명 선에서 제한을 두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전황이 UN군과 한국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한민국 국회는 1951년 5월에 징병제를 부활시켰고, 1953년 7월 전쟁이 끝날 시점에 58만 명. 그리고 이후 60만 명 수준을 계속 유지하다가 2020년대에 이르러서야 50만 명대로 감축하는 추세이다. 그 이전에는 모병제였다. 하지만 법을 다시 고치기 전까지 모병을 받은 게 절대 아니라, 가택수색을 하거나 거리 가두모집으로 청년들을 끌어다가 군대에 닥치고 넣었던 시절이었다. 이러다 보니 민심도 흉흉해지고 갑자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하면서 국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국회가 징병제를 부활한 이유는 이런 식으로 징집을 하지 말고 제대로 선별해서 징집하라고 한 것. 물론 남북대립이 징병제 도입의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나, 남북분단이 없었더라도 징병제 자체는 높은 확률로 도입되었을 것이다. 이미 한국의 위쪽에 중국과 소련이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에 비해 병력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징병제도 지금보다는 널널하게 운영되었을 것이다. 또한 징병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분위기 역시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이 든 세대들이 [[빨갱이]]란 말이라면 그야말로 과민할 정도로 반응하는 이유기도 하다. 대한민국 육군이 공군, 해군, 주한미군에 비해 휴가, 외박에 좀 더 보수적인 이유도 당시에 출타자가 지나치게 많아(농번기 휴가) 초기 대응에 실패한 데서 나온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남침 징후 등을 좀 더 빨리 포착할 수 있게 되었고 교통 환경도 개선되면서 많이 나아졌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년이 지난 뒤인 1949년 8월 병역법이 만들어지면서 징병제가 자리 잡았다. 이 법에 따라 1950년 1월 첫 번째 징병 검사가 이뤄졌다. 그런데 그 검사를 끝으로 징병제가 없어졌다. 남한의 최대 원조국이었던 미국이 대한민국의 무장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1945년 8.15 광복 뒤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3년 동안 군정을 편 뒤 이승만 정부에게 정권을 넘겼다. 그러면서 남한의 군 병력 규모가 10만 명을 넘지 않도록 했다.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 대해 군사행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징병제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병력 10만 명을 쉽게 넘길 수 있다고 본 미국은 이승만 정부에게 압력을 넣었다. 정부는 마지못해 징병제를 폐지해야 했다. > >남한이 다시 징병제로 돌아가게 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8월 대구 징병사무소. 신병들은 짧은 군사 훈련을 받고 바로 전선으로 갔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정부는 전시 동원체제를 갖추면서 징병제를 다시 들였다. > >전쟁의 혼란 속에 제 발로 스스로 군대로 걸어 들어가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길에서 지나가는 남자를 강제로 데려가고, 집을 뒤져 데려가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모인 국민방위군이 70만 가까이 됐다. > >하지만 이들을 통솔하던 일부 군 간부들의 부패와 무능력이 문제였다. 병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과 군복을 빼돌려 암시장에 내다 팔아 배를 불렸다. 그로 말미암아 5만 명(일설에는 12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잃은 사람만도 20만 명에 이르렀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의 80%가 신체적, 정신적 상처 탓에 전투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 >전쟁 중에도 이 비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이승만 정부는 성난 민심을 다독거리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문제의 국민방위군 간부 5명은 총살형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도 많은 사람이 그때의 비극을 쉽게 잊지 못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195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징병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 >---- >김재명, 병역 징병제냐 모병제냐, 65~6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